[교육언론창 이재남] 모난 돌이 정 맞는다?_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기계적 중립? 자기 목소리 내고 밖으로 나와야

‘중립’이나 ‘중도’라는 개념은 왜 ‘편안함’ 같은 것을 줄까? 중립이나 중도라는 개념이 안정감을 주는 것은 우리 역사의 치열한 좌우 갈등에서 온 것이다.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노선투쟁이나, 해방 이후 찬탁 반탁운동, 전쟁 과정에서 빨갱이, 파랭이 학살, 제주 4.3의 민간인학살, 분단 이후 남북한 대치 등 우리 역사는 밤에는 산에서 내려오고, 낮에는 뭍에서 나타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밤낮이 바뀌는 피 흘림의 역사가 계속되었고, 그런 연후로 살아남기 위해서, 중립이나 중도로 위치 할 수밖에 없는,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민초들의 고단함이 배경일 수 있겠다.
보신의 철학과 처세술
이런 역사로 인하여,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보신의 철학은 가장 중요한 처세술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중립이나 중도라는 개념은 서민들의 생각 도피처, 은신처 역할을 했다. 서민들이 생존을 위해 기계적 중립에 도피했다면, 국가 시스템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행정가들은 지위 유지의 보신을 위해 이곳에 은신했다. 위정자들이나 독재자들은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고개를 쳐드는 이들에 대한 망치 다듬이질을 통해서, 집권 세력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 없는 다수의 동의를 내면화 시켰다. 중립의 달콤함은 안정과 편안함이었고, 위정자들은 그것을 잘 이용했다. 기계적 중립에 은신하는 이들 중에는 언론과 기자들도 있다. 이들은 양시론이나 양비론, 침묵을 무기로 그곳에 은신한다. 그들에게 정론이란 권력의 향방에 따라 결정되는 먹고사는 태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소위 중립이나 중도, 또는 객관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중립이나 중도에 은신한 이들이 어떻게 거대한 비극을 잉태하는지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을 통해 말한 바 있다.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의 모습은 그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았다.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비극을 실행한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저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는 괴물이 아니었다. 평생 책상 앞에서 서류를 정리하며 살아온 평범한 공무원이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불렀다. 그의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명령이라는 형식과 중립의 지형형 뒤에 숨으면 악은 정말 평범해지는 걸까? 아이히만은 기계처럼 움직였고, 그의 손끝에서 수백만 생명이 스러졌다. 그 평온한 얼굴 뒤에는 인간으로서의 고민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 MBC를 퇴사하고 대안 방송을 하는 장인수 기자는 최근 발행한 그의 책 <작심하고 다시, 기자>에서 중립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한쪽에선 지구가 네모나다고 주장하고, 한쪽에서 둥글다고 해. 그런데 언론이 짠 나타나서 양쪽의 주장을 똑같이 보도해. 그리고 나서 우리는 모르겠고 중립을 지켰으니 이제 국민이 알아서 판단하라고 해. 이게 중립이니?” 불편부당을 핑계로 왜곡된 현실을 외면하거나, 시대정신을 망각한 사람을 언론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근에 불법한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군인들을 항명죄로 협박하고, 법률을 위반한 업무를 할 수 없는 행정가들을 지시 불이행과 성실의무 위반으로 협박하고, 만인 앞에 평등하게 적용해야 할 법을 아첨꾼들을 앞세워, 권력으로 협박하고, 정론·직필의 진실을 보도해야 할 언론을 생계로 협박하는, 꼬리가 몸을 흔들고, 수단이 목적을 참칭하는 가치가 뒤집힌, 괴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계적 중립에 은신하고 있던 모든 가치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명령에 따른다는 구실로, 아우슈비츠의 교도소장이 되어, 독가스를 공급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며, 양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눌지도 모른다. 언론이 기계적 중립에 은신해 있을 때 사회적 공기는 오염되고, 미래사회를 논하지 않는, 국가의 앞날은 암울해질 것이다. 행정가들이 공정성과 준법, 성실의무 운운하며, 기계적 중립에 은신할 때, 공적 시스템은 부패하고, 줄서기 문화가 횡횡하고, 공정한 복지사회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중립과 중도의 안락함에 취해 있는가?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중립과 중도의 안락함에 취해 있는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생각할 일이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중립 은폐 기술>, 소위 ‘착한 척’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해 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비극을 막는 첫걸음이 아닐까.
- 평동초등학교장 이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