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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실탄(原考實彈) / 광주드림

물고기와대화 2024. 5. 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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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은 국가의 재화와 용역을 모든 국민에게 형평성 있게 전달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한다.

 행정을 하다보면, 조건에 따라 매우 다양한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게되면, 나중에 큰 곤란을 겪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공무원들은 법과 규정을 우선으로 고려하여, 업무를 추진한다.


 그러나 실제 업무를 추진하다 보면, 법과 규정, 세부 지침에는 없는 매우 다양한 양상이 펼쳐지기 때문에 규정만 찾아서는 해결될 수 없는 일이 생긴다.

 이럴 때는 공론화나 숙의 과정 등을 통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 과정도 시간과 예산 등이 필요해서 단기적으로 벌어지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쉽지 않다.

 대표적으로 몇년 전 세계적으로 다가온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대처하는 방역 등 일련의 작업이 그렇다.

 또한,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재난 재해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일도 그렇다.

 현장 상황에 맞는 창의적인 대응 전략을 펴야 하는데, 법과 규정에는 없거나, 부분적으로는 지침을 위반하게 되거나, 나중에 위법성에 대한 책임이 발생할 여지가 있는 것은 더 그렇다.

 최근에는 적극 행정을 통해, 업무 과정의 실수로 인해, 민형사상의 법적 책임이 발생했을 때, 예산이나 법률지원 서비스를 구축하고 있으나, 여전히 공무원들에게는 무거운 문제이다.

 팬데믹 상황이 급박했던 그해 겨울이 생각난다. 어렵게 방학에 돌입했지만, 교과서를 나누어 줘야 하고, 진단키트를 일제히 나누어 줘야 하고, 온라인 학습 도구도 배포하고, 방역 지침 교육과 발생 대처 숙지, 발열 체크 시스템 구축 등 전방위적으로 몰아치는 급박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감염으로부터 지키고, 학교 문을 열어서 공부하고, 밥을 먹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업무에 임했던 기억이 있다.

 운동장 한쪽에서 시간별로 등교 인원을 조절하여, 교과서와 학습자료를 배포하고, 모든 직원이 출동하여 진단키트를 봉투에 담아 나누고, 감염자가 발생하면 동선을 추적하고, 격리하는 작업등 어떻게 그 많은 의외의 상황을 헤쳐 나갔는지 생각하면 아득하다.

 이때, 교육부에서 내려온 지침 중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공문 한 줄이 있다.

 모두가 국가방역지휘부만 쳐다보고 있었고, 매일매일 감염 상황과 대처 상황을 브리핑을 할때 였으니, 일선 학교에서는 교육부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공문의 내용은 이렇다.
 ‘원(原)칙을 고(考)려하되, 실(實)정을 감안하여 탄(彈)력적으로 운용한다.’라는 지침이다. 나는 이 지침을 ‘원고실탄(原考實彈)’이라 부른다.

 언뜻 들으면, ‘알아서 하라’는 식의 의미로 들리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행정의 ‘치트키’라 할 정도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지침이다.

 원칙을 고려한다는 말은 법과 규정을 우선으로 고려하라는 말이고, 실정을 참작하라는 것은 법과 규칙의 예외 상황이 많이 발생하고 있으니, 현장의 실정을 참작해서 판단하는 것이며, 탄력적 운용하라는 것은, 모든 조건을 고려하여 현장 책임자가 경직되게 운용하지 말고, 현장 중심의 자율적인 판단을 하라는 의미다.

 이 지침을 근거로 감사부서에서 현장 감사를 한다면 이런 착안 사항이 도출될 것 같다.

 원칙을 잘 알고 있는가? 이 원칙을 적용할 수 없었던 이유는? 현장의 실정을 참작한 구체적인 사례는 무엇인가? 탄력적 운용하기 위한 절차와 과정은 어떠했는가? 등의 포인트를 잡을 수 있겠다.

 이 얘기는 원고실탄의 지침이 ‘맘대로’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원칙과 실정을 정확하고, 깊숙하게 파악하고, 책임 있게 판단하라는 취지다.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면서, 탄생한 이 ‘원고실탄(原考實彈)’의 ‘치트키’는 모든 행정에서 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지침이라고 생각한다. 
2024.05.08 이재남


출처 : 광주드림(http://www.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