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21-05-07 오후 2:10:00 | 최종수정 2021-05-07 14:10
이재남 광주양산초등학교 교감
처음 강가로 낚시를 하러 갔을 때, 옆에서 낚시하던 아저씨의 기이한 행동을 목격한 적이 있다. 지루하게 한참을 기다리던 끝에 찌가 흔들리고, 챔질을 조심스럽게 하던 아저씨의 낚싯대에 제법 큰 붕어가 걸려 나왔다. 아저씨는 바늘을 조심스럽게 풀어내서 한참을 쳐다보더니, 붕어를 다시 강물에 놓아주었다. 나는 궁금해서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왜 붕어를 그냥 다시 놔 주세요?” 아저씨는 배시시 웃으며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한 마리라도 낚기 위해 종일 땡볕에서 낑낑대고 있는데, 저 양반은 잡은 고기를 그냥 놔주네’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낚시가 물고기를 잡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낚시 그 자체를 좋아하는 목적이 되는 순간, 낚시행위는 매우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세월을 낚는다’는 것의 의미와 ‘일자바늘’로도 낚시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가한 강가에서 한밤을 꼬박 새우며 밤새 낚시를 했지만, 동이 틀 무렵 겨우 조그만 붕어 한 마리를 낚은 강태공이 다시 강물에 물고기를 놓아주며 헤엄쳐 사라지는 물고기를 쳐다본다. 수단이 목적이 되었거나, 목적이 수단 속에 있는 순간이다.
교육행위가 무엇인가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교육행위라는 그 수단 속에 가치가 내재하여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무엇(교과)을 가르치는가보다 교육(낚시)이라는 고유한 행위 속에 내재적인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교육의 목적이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반듯한 직업인을 기르고, 사회에 잘 적응하고, 건강하고 윤리적인 인간을 육성하는 것(교과)이 아니라, 교육행위 그 자체에 목적이 내재한다는 생각은 교육행위의 윤리적 태도가 발원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어떤 영역에서든지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프로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목적을 지향하지만, 결국에는 과정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궁극적인 결과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교육행위 그 자체에 고유한 의미를 탐구하는 작업을 학자들은 교육의 본위적 탐구라고 한다. 존 듀이가 한 때 교육의 목적이 ‘성장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하여, 주지주의자들부터 준거없는 교육으로 비판을 받은바 있다. 그는 ‘경험의 재구성과 성장’을 통한 ‘반성적 사고’를 교육의 내재적 가치로 말한 바 있다. 교육목적으로서 인간의 성장은 도달점을 가늠해보고, 한계도 설정해보고, 이를 발판삼아 과감하게 더 밀고 나가는 ‘수고로운 과정’을 내면화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며, 시대와 집단,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도구적인 태도를 전제한다면, 당연히 진보의 기제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한 확증 가능성이 관건이 된다.
좋은 교육, 좋은 선생님, 좋은 수업은 어떤 가치를 담고 있을까를 교육 본위적 관점에서 보면, 무엇을 가르치는가보다 어떻게 가르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성장 그 자체인,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단백질이 중요한 영양소라고 하며, 적절한 과정 없이 고기를 먹이는 것은 오히려, 독을 먹이는 것과 같다. 기도는 천국에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도 그 자체에 천국의 가능성이 내재한다. 과정속에 목적이 실현되고 있음을 말한다.
자연은 순환의 원리로 다양하게 환원되고 있을 뿐인데, 인간이 목적을 인위적으로 분리한 것이다. 여전히 고민은 남는다. 굵직한 장어가 낚이고, 싱싱한 참돔이 낚이고, 쫄깃한 주꾸미가 따라 올라오고, 대물 은갈치가 퍼덕이는 이 손맛 속에는 물고기에 대한 욕심은 진정 없는 것인가.
교사는 어떤 물고기가 낚일지 모르면서도 평생을 낚시 그 자체에 공을 들이는 장인들이다. 그래서 좋은 선생님은 가르침의 태도 속에서 아이들이 모든 것을 배우게 한다.
기사제공 : 주간교육신문
http://www.edu-week.com/news/view.asp?idx=14858&msection=6&ssectio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