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교육 2014.12월호
수업의 맛(질리지 않는 담백함)
나는 수업을 ‘집밥’으로 은유하곤 한다. 수업은 식당 밥이 아니고 집밥이다. ‘집밥과 식탁’ 속에는 중요한 가치들이 담겨있다. 어떤 가치일까?
‘첫째는 공동체와 인정의 가치다. 집밥이 올라가는 식탁은 가족들이 매일 다시 만나고 다시 출발하는 지점이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단의 맛을 이래저래 애교있게(?) 논할 수 있겠지만 재단(裁斷)하지는 않는다. 절대 믿음과 인정이라는 강력한 공동체 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강한 신뢰를 형성하고 애정과 안정감, 보람을 솟아나게 한다. 수업이 삶이 교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거창한 황금레시피가 아니라 따뜻한 격려와 애정, 진정한 조언이다.
둘째는 가족의 식탁이 주는 참여와 협력의 힘이다. 모두가 함께 준비하고 나누며 힘을 얻는 공간이다. 식당 밥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가치다. 식당 밥은 맛없으면 다시는 안가면 되지만 ’집밥으로써의 수업‘은 늘 함께 나눠야 할 삶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셋째는 소통의 힘이다. 가장 원초적이면서 가장 가까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다. 사소한 문제부터 나랏일 걱정까지 대화의 폭이 매우 넓지만 대화 자체가 필요 이상으로 심각해지지 않는다. 집밥을 먹는 식탁처럼 신뢰와 소통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치유의 힘이다. ‘집밥’은 일상에서 쌓인 피로와 애증을 풀고, 새로운 출발을 다니는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가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와 인정의 가치다. 상품 생산 라인의 분업이나 협업과는 다른 교육공동체적 가치가 있다. 전자가 복제 가능한 세계의 창조라면 후자는 복제할 수 없는 세계의 창조다. 전자가 자연과학의 세계라면 후자는 단정지을 수 없는 예술의 세계다. 전자가 평가의 세계라면 후자는 이해의 세계다. 전자가 양적인 측면의 세계라면 후자는 질적인 비평의 세계다.
집밥은 질리지 않는 담백한 맛을 그 본질로 한다. 물론 가끔 맵고, 짜고, 고소한 맛이 가미되기도 하지만 결코 질리지 않는 담백함이 주는 본질을 침해하지 않는다. 훌륭한 요리는 기본에 충실하면서 적절히 다른 맛들을 가미하는 오랜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종종 너무 화려하거나 요란하지도 않지만 아이들의 힘을 바탕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도달점을 향해 치밀하게 진행되는 수업을 만나곤 한다. 이럴 때 경험 많은 교사들은 그런 수업 속에서 ‘담배한 맛’을 감식(Connoisseurship)해 낸다. 좋은 수업은 집밥처럼 질리지 않고 편안하면서도 은근한 힘이 느껴지는 그런 ‘담백한 맛’이 아닐까.
멋(안정된 호흡)
멋있는 수업은 화려한 수업이 아니다. 멋있는 수업은 안정감 있고 세련된 수업이다. 이 안정감은 수업의 치밀한 준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소 아이들과의 삶의 관계 속에서 나온다. 아이가 젖을 깨문다고 해서 엄마는 당황하지 않는다. 아이가 칭얼댄다고 해서 내치지 않는다. 안정감은 아이들과 교사의 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배움이 상존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이다. 수업은 교실 속, 삶 속에서 단련된 아이들과의 호흡이다. 진정한 수업의 멋은 어떠한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호흡에 있다. 수업의 기술은 이 안정된 호흡과 자신감이 바탕이 되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흥(가르침의 행복)
흥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인가에 지치지 않고 즐겁게 임하게 하는 힘이다. ‘수업의 흥’은 교사가 느끼는 ‘가르침의 행복’에서 시작된다. 수십 년 동안 교단에 서지만 ‘가르치는 맛’을 느끼고 정년하는 교사가 얼마나 될까?
가르침의 과정은 모든 일이 그렇듯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힘든 노동이다. 농부는 농작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보람을 얻고 삶을 충전하고 힐링을 한다고 한다. 가르침의 행복은 교육의 수단적 가치를 걷어내고 교육 그 자체(가르치는 행위)를 온전히 목표로 대할 때 느껴지는 것이다. 어느 철학자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라고 말했다. 나무라는 ‘본질’이 의자도 만들고, 식탁도 만드는 것처럼 ‘사물은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유한한 삶의 실존의 문제가 더 앞에 다가오는 존재’다. 교사의 실존적 자존감은 교육의 수단적 가치를 걷어내고 ‘가르침 그 자체에서 오는 행복’을 절대시할 때 오는 것이다. ‘행복한 청소부(독일의 동화책)’와 ‘행복한 죄수’의 차이는 행복이 단순한 체념적 자기만족이 아니라, 절대 자유의 욕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행복한 청소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재남 광주교육청 정책기획담당 장학관>